[J Report] 정치가 꼬아놓은 전기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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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7 0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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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지식경제부는 지난 연말 전기를 많이 쓰는 ‘기업형’ 영농법인(계약전력 300㎾ 이상)에 농사용이 아닌 산업용 요금을 물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농사용은 원가의 34% 수준인 가장 값싼 전기다. 2005년 0.9% 오른 뒤 단 한 차례도 인상하지 않았다. 이 전기의 40%를 전체 사용자의 0.4% 정도인 기업형 영농법인이 쓰고 있어 문제라는 게 지경부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은 5개월여가 지난 지금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 지경부 관계자는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고만 말했다.
오히려 올 들어 농사용 전기를 쓰는 곳은 더 늘었다. 농산물 산지유통시설, 수산물 저온보관시설, 굴 껍질 처리장 등이 농사용 전기를 쓸 수 있는 곳에 추가됐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농어민이 볼 피해를 보전해주자며 지난해 여야가 합의해 정했다. 이렇게 원가에 한참 못 미치는 농사용 전기의 소비가 늘면서 한 해 한국전력공사가 입는 손실만 7000억원에 달한다. 정한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은 “정부가 재정으로 부담해야 할 농어민 지원을 전기요금으로 떠넘긴 셈”이라면서 “결국 그 부담은 다른 사용자들이 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기세(稅)’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국에서 전기요금을 결정하는 건 경제 논리가 아니라 정치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지난달 한국전력공사 이사회는 원가 계산을 토대로 정부에 13.1% 인상안을 인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지경부 관계자 말대로 “참고사항일 뿐”이다. 실제 요금은 ▶지식경제부 내부 검토 ▶기획재정부와의 정부 내 협의 ▶당·정 협의 ▶청와대 보고를 거쳐 결정된다. 자연히 요금에도 원가나 시장 상황보다는 정치 역학이 많이 반영된다. 특정 사용자층의 요금 부담이 다른 사용자층에게 전가되는 ‘교차보조’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이다.
최근 산업계와 정부·한전이 요금 인상 문제를 놓고 힘겨루기에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0년대 이래 수출 증대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면서 정부는 정책적으로 제조업체에 싼 전기를 공급했다.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주택용과 일반용의 ‘원가 회수율’이 100%를 넘었던 2005년에도 산업용 원가 회수율만 89.3%였다. 산업계가 이렇게 ‘지원’ 받은 게 2001년 이후에만 14조4000억원에 달한다고 한전은 주장했다.
반면 가정용은 요금이 상대적으로 비쌌던 데다 사용 자체를 억제했다. 1차 오일쇼크 이후인 74년 도입된 누진 요금제가 대표적인 장치다. 가정용 전기는 사용량에 따라 가격이 6단계로 급격히 올라간다. 최고 구간의 요금은 최저 구간의 11.7배다. 물론 해외에도 누진제를 활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하지만 통상 누진단계는 3단계, 가격차는 1.5배를 넘지 않는다.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이런 기조는 지난해 이후 반전됐다. 대기업이 잘나가면 모든 경제 주체들이 혜택을 본다는 이른바 ‘낙수효과’에 대한 회의론이 강해지면서 정부 정책의 강조점은 ‘동반성장’과 ‘민생’으로 옮겨갔다. 여기에 9월에 터진 정전사태도 변화의 계기를 제공했다. 정부는 지난해 산업용 요금을 두 차례, 각각 6.1%·6.5%씩 올렸다. 반면 주택용은 한 차례 2%만 인상했다. 그 결과 올해 산업용 전기의 원가회수율은 주택용을 넘어섰다.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 산업용과 주택용의 원가회수율은 각각 92.4%, 84.7%다.
숫자로만 보면 이번에는 주택용도 상당 폭 올려야 한다. 하지만 정부나 정치권 모두 주택용 요금 인상은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지난해 전력위기 대응 태스크포스(TF)를 이끌었던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TF에서 정전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기요금을 최소한 원가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지만 실제 인상 폭은 크게 못 미쳤다”면서 “선거를 앞둔 상황이라 정부의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올려야 한다면 이번에도 산업용, 특히 대기업이 많이 쓰는 고압요금이 표적이 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우선 ‘전력대란’이 발등의 불인 지경부로선 전체 수요의 55%를 차지하는 산업용 수요를 억제하는 게 시급하다. 또 물가안정이 우선인 재정부는 가급적 소비자물가를 직접 끌어올리는 가정용 전기료 인상은 피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다.
분위기를 감지한 산업계는 선제공격에 나섰다.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들은 “차라리 산업용뿐 아니라 주택용·일반용 등 모든 요금을 현실화하라”고 요구했다. 정부의 ‘아픈 부분’을 물고 들어가 가파른 인상을 막겠다는 의도다.
진통이 커지면서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는 “다음 달 당장 인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여름이 시작되는 7월, 4~5% 올리는 수준에서 타협할 가능성이 많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전기요금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커지는 건 장기간 요금이 정치적으로 결정되면서 요금 체계가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국제유가 급등 당시 인상 타이밍을 놓친 게 ‘불씨’가 됐다는 분석이다. 당시 정부는 요금 인상 대신 한전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일부 손실을 메워주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크게 벌어졌던 요금과 원가 간 격차는 지금껏 메워지지 않고 부담이 되고 있다.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는 전기요금 결정을 정부와 정치권에서 독립된 규제기관이 결정하는 형태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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