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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 불면…날씨 때문에 무너진 영웅 카이사르

꿈이 좋아 2018. 1. 28. 10:08

동풍 불면…날씨 때문에 무너진 영웅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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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혹심한 가뭄이 찾아든 중국 정저우(鄭州)의 말라붙은 호수 사진이다. 인류사의 역대 유명한 전투에서 비와 바람 등 기후 조건은 늘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했다. [정저우 AP=연합뉴스]

날씨와 기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얼핏 구분이 쉽지 않다. 기상청에 따르면 날씨는 그날그날의 비·구름·기온 따위가 나타나는 상태를 말하며, 기후는 어떤 지역에서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정 기간의 평균 기상 상황을 말한다. 이런 날씨와 기후는 자연재해를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때에 따라서는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역사를 뒤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는 1644년 277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물론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자성(李自成)의 난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날씨도 한몫했다. 당시에 명나라는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한 치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속은 부글거리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622년부터 1629년까지 8년 동안 내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았다. 1633년에는 지금의 시안(西安)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다. 몹시 가물어 쌀값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36개의 도적 집단이 연합해 약 20만 명을 모아 이자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을 일으켰다.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는 개봉이었다. 개봉은 명나라를 대표하는 강력한 도시였는데 과연 몇 달을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 이자성이 선택한 무기는 바로 ‘장마’였다. 황허(黃河) 지역에 둑을 쌓아 때마침 쏟아진 장맛비를 가두었고 1642년 9월에 둑을 터뜨려 개봉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2년 후 명나라는 멸망했다. 명나라의 멸망은 이렇게 날씨와 관련이 깊다.

명나라 몰락 재촉한 8년 대가뭄
중국 최초의 농민전쟁도 날씨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209년 초여름이었다. 지금의 베이징(北京) 인근인 위양(漁陽)으로 향하던 900명의 진나라 병사들이 장마로 인해 도착이 늦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정해진 날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한다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이때 참수형을 피하기 위해 진승(陳勝)이 오광(吳廣)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전쟁이다. 전쟁 기간 중에 많은 비가 왔는데 이 비는 잘 훈련된 정규군에게는 유리했지만 훈련이 되지 않은 농민군에게는 불리했다. 특히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야간전투에는 더욱 그러했다. 결국 농민반란전쟁은 진나라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이 반란은 훗날 진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우리 역사에서도 날씨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었다. 부여 왕 대소는 고구려의 2대 왕인 유리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 오랜 한파와 가뭄으로 인한 식량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고구려도 가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하자 조공을 거부했다. 그러자 대소는 6년 11월, 5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때 예기치 못한 한파와 폭설이 내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부여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7년 후인 13년 11월 다시 대소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때 고구려는 3대 왕 무휼이 왕으로 있었다. 대소왕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코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대무신왕 무휼의 전략은 명확했다. ‘날씨’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을 이용해 설마 하고 방심했던 상대를 쳤다. 2차전에서도 부여군은 대패했다. 약 9년 후인 22년 2월에 또다시 대소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전차와 기병을 중심으로 한 부여군은 언 땅이 따뜻한 봄기운으로 인해 녹아 진흙탕이 되자 그만 발이 묶였다. 이를 틈타 대무신왕은 중심부를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고 부여군은 또다시 대패했다. 이 3차전에서 부여 왕 대소가 전사하고 마침내 부여는 망했다.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다. 당시 고려의 우왕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을 준비했다. 이때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정벌을 반대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면 안 된다. 전군이 원정으로 나가면 왜구의 침입이 우려된다. 여름철에 군사를 발동시키면 안 된다. 장마철이 되면 활쏘기가 불리하고 질병 발생의 우려가 있다. 그러나 “요동 정벌은 나의 숙원”이라고 고집하는 우왕으로 인해 결국 출정했고 1392년 음력 5월 7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했다. 이때 압록강 지역에 장마가 시작되었고 뗏목을 탄 채 무리하게 건너다가 수백 명이 익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의 전반적인 기후는 심한 장마뿐만 아니라 6, 7월의 차가운 바람과 여름 냉기로 인해 군사의 기동조차 어려웠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돌아온 우왕의 답변은 “도망병은 현지에서 참하라”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이성계는 군사를 돌이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다. 날씨가 왕조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날씨 때문에 영웅도 무너진 예가 있다. 바로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 브리튼(영국) 정복전쟁에 나섰다. 8월 25일 이티우스항에 집결한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때마침 불어오는 동풍에 맞춰 출항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브리튼 해안에 도착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두고 처칠은 “대영제국의 역사는 이때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깎아지른 절벽을 사이에 두고 켈트족과 격전을 벌인 로마군은 많은 피해를 보지만 결국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폭풍우는 로마군함을 파괴했고 원정군에게 생명줄과 같은 식량과 무기를 앗아갔다.

뜻밖의 재해에 어쩔 수 없이 물러가게 된 카이사르는 1년간 절치부심 끝에 다시 2차 침공을 준비했다. 브리튼으로 순항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동풍이 불어야 했는데 오히려 서풍이나 북서풍이 불었다. 당시 기상 상황은 여름철마다 북대서양에서 발달하는 아열대 고기압에 중심부를 둔 아조레스 고기압의 영향으로 서풍이나 북서풍이 많았다. 기다리던 중에 드디어 동풍이 불었다. 카이사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브리튼으로 대군을 이동시켰다. 전차로 무장한 켈트족이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로마군이 기선을 잡았다. 그러나 동풍이 불면 폭풍우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카이사르는 몰랐다. 한 차례 격전 후에 찾아온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는 순식간에 닻으로 지탱한 로마군의 전함과 수송선 12척을 삼켜버렸다. 결국 카이사르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쓸쓸히 물러났다. 만약에 카이사르를 가로막은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영국의 역사는 다르게 씌었을 것이다.

장례식 규모도 富·권력 아닌 날씨가 좌우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는 나의 태세를 점검하는 요소로 다섯 가지의 기준이 나온다. 이른바 오사(五事)라고 하는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천(天)의 요소는 날씨와 기후에 관한 것이다. 정확히 원문을 보면 이렇다. “천이란 밤과 낮, 추위와 더위, 사계절의 변화를 말한다(天者 陰陽 寒暑 時制也).” 하루 중의 변화로부터 일 년 사계절의 모든 변화를 담고 있다. 날씨를 예측하고 미리 그에 맞는 복장과 무기를 준비하며 다양한 날씨 상황에 맞춰 훈련된 부대는 승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대는 패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날씨는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사업을 하는 기업체나 세일즈맨에게는 날씨가 매출을 좌우할 정도다. 날씨 경영, 날씨 마케팅은 그래서 나온 용어다. 유통업계에서는 ‘경기는 3할, 날씨는 7할’이라는 말이 있다. LG유통 조사에 따르면 소주가 가장 많이 팔리는 기온은 10도 내외였고, 가장 적게 팔리는 기온은 20도 내외였다. 세계기상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날씨 정보를 활용하는 데 쓰이는 비용은 투자액 대비 10배 이상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청에서는 보다 정확한 날씨 예측을 위해 첨단장비를 갖춘 기상관측선 기상1호를 운영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첨단과학기술을 이용해 날씨를 예측하고 여러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범위는 제한된다. 일본의 거대한 쓰나미나 미국의 토네이도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영원의 화제(話題), 모든 병의 원인, 늘 불평을 듣는 것이 날씨다.” 『보바리 부인』의 작가 G 플로베르의 말이다. 날씨는 본질적으로 심술궂고 변덕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사실상 인간이 천(天)의 요소를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속성을 잘 이해하고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국립기상연구소는 봄비가 한 번 내릴 때의 경제적 효과가 평균 1151.9억원이나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아직도 날씨에 둔감한가? 그렇다면 마이클 프리처드의 말에 주목하자. “얼마나 큰 부자가 되건, 얼마나 유명해지고 권력을 가지건 간에 당신의 장례식 규모는 그날의 날씨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날씨와 기후를 보다 전략적으로 다루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보듬자.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삼킬 것이다.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1919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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