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베트남 간 남편에 "돌아오지마" 아내 문자 왜?
꿈이 좋아
2018. 1. 28. 10:05
베트남 간 남편에 "돌아오지마" 아내 문자 왜?
- 포스트 상세 정보
- 2012-04-29 07:38:01
- 조회 (88) | 추천 (0) | 퍼간사람

포스트 제어
쓰기 | 수정 | 삭제 | 이동 | 메일 | 인쇄
|
| | |
|
|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갈라서는 부부가 늘고 있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남이 된 부부들은 11만4300쌍, 1000쌍당 9.4쌍이 이혼했다. 전년보다 이혼율은 2.2%포인트 줄었지만, 혼인신고 없이 살다 헤어지는 커플이 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혼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는 1인 가구수가 2010년 말 415만3000여 가구에서 올해 453만9000여 가구(추산)로 9.3% 늘어난 데서도 확인된다. 1인 가구의 상당수가 ‘돌싱(돌아온 싱글) 가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부부의 소중함을 되짚어보는 ‘위기의 부부들’ 시리즈를 시작한다.
남편(57)은… 오늘도 라면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다음 주 끼니는 다음 주에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실직한 가장 김모(57)씨는 한 손에 컵라면을 들고 베트남 하노이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숙집 거실에 설치된 컴퓨터를 켠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고 메일함을 확인한다.
“즐겁고 행복한 우리 생활을 해치지 마세요. 베트남에 계속 있든가, 중국이나 미국에 가든가 제발 한국에는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머리가 멍하다. 울화가 치밀지만 어쩔 수 없다. 친구에게 300만원을 빌려 밀린 하숙비를 주고 난 뒤라 호주머니엔 돈이 한 푼도 없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답장을 보내야 한다.
“속이 상하겠지만 1000만원만 통장에 넣어줘요. 어떻게든 살아볼 테니까.” 라면으로 연명하고 아내에게 돈을 구걸하는 인생은 내 원래 모습이 아니었다. 서울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나는 소위 ‘잘나가는’ 축에 속했다. 결혼 전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고 호감을 가진 아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왔고, 그 길로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1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다. 섬유수출을 하는 회사에 근무하다 보니 해외 출장이 잦았다. 승진도 동기들보다 빨리 할 정도로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월급은 꼬박꼬박 아내에게 보냈다. 중학교 교사인 아내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아 결혼 2년 만에 서울에 집을 마련했다.
2000년 초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한다고 했다. 이미 섬유업은 중국으로 중심축이 넘어가 있던 터라 회사가 문을 닫을 상황에 내몰렸다. 별 수 없이 회사에 사표를 냈다. 아내에겐 “좀 작은 회사지만 고액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옮긴다”고 했다. 그러고는 베트남 호찌민 영업소장으로 발령받아 나갔다. 아내는 군소리 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의 일은 잘 돌아가는 듯했다. 첫 달엔 300만원 남짓한 생활비를 한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뒤로 몇 달씩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호찌민 사무소는 3년 만에 폐쇄 결정이 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일자리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나이 50을 바라보는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집에서 인터넷을 하거나 바둑을 뒀고, 아내는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 보기가 민망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건 2010년 초였다. 동업을 하면 회사의 대표 자리를 준다는 거였다.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베트남으로 가기로 했다. 두 번째 베트남행을 앞둔 어느 날 아내는 “당신이 집에 있는 건 우리 가족의 불행이야. 비행기표 끊어줄 테니 베트남에 가서 살아. 우리 식구 괴롭히지 말고…”란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가슴이 쓰렸지만 생활비를 벌어다주면 닫힌 아내의 마음이 열릴 것 같았다. 아내는 사업자금으로 2000만원을 내줬다.
사업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도착한 지 몇 개월 만에 월급이 끊어졌다. 아내에게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보냈고 얼마간 아내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아내는 돈을 보낼 때마다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편이란 존재가 싫다고 했다. “이스라엘 키부츠 농장에 가든, 뉴질랜드에 가서 과일을 따든, 미국에서 청소를 하든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아내의 타박은 이어졌다.
아내(55)는… 남편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처음 베트남에 취직이 돼서 떠난다고 했을 때 남편은 이미 남이었다. 지금껏 회사 일이 항상 먼저였다. 시골 학교 교사인 내가 출산이 임박했다고 전화했지만 남편은 “회사 일이 바빠 올 수 없다”고 했다. 안 입고 안 먹어가며 집을 사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도 모두 아내인 내 몫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잘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은 회사에 취직해 베트남으로 가겠다니. 나와 아이들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베트남에서 하던 일이 잘 안됐는지 3년 만에 돌아왔을 땐 철이 없어 보였다. 일자리가 널려 있는데도, 남편은 쉽고 편한 일만 찾았다. 중소기업 몇 군데를 다니다가는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또 사표를 냈다. 낮에는 자고 저녁엔 술을 마시러 나가면서도 대학입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아이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남편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땐 차라리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자금을 대주면서 대신 집 명의를 내 앞으로 돌려달라고 했던 건 혹시나 사업이 망해 집마저 날릴까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남편은 “두고 보라”며 흰소리를 했다.
베트남에 가서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돈을 보내 달라”는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돈을 보내줬지만 아이들 결혼자금까지 손을 댈 수는 없다. 더 이상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선택은… 남편은 2010년 10월 귀국했다. 동생의 집에 머물며 이혼소송을 냈고 서울가정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 아내 앞으로 돌려놨던 재산 중 2억800만원을 남편에게 주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가정 파탄의 책임은 쌍방에게 있다”고 했다. 남편은 바둑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아내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했고, 아내 역시 남편의 실직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퇴직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집에 있는 50~60대 가장을 뜻하는 ‘젖은 낙엽족’. 최근 들어 젖은 낙엽족의 이혼소송과 상담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60대 이상 남성의 이혼상담 건수가 2010년 57건에서 지난해 122건으로 급증했다.
은퇴 후 가족으로부터 ‘왕따’의 고통을 느끼는 가장들에게 전문가들은 이런 조언을 남겼다. 자녀를 일보다 후순위로 두지 말라. 밖에서 돈을 벌어다주는 것으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은퇴를 설계할 때 재무계획만을 짤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회복에 관한 계획도 필요하다. 퇴직 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남편을 보면서 우울증에 빠지는 ‘은퇴한 남편 증후군’에 시달리는 아내 입장도 배려해야 한다는 소리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