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보물 745호 ‘월인석보’를 어찌하오리까

꿈이 좋아 2018. 1. 24. 09:05

보물 745호 ‘월인석보’를 어찌하오리까

포스트 제어

쓰기 | 수정 | 삭제 | 이동 | 메일 | 인쇄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다음 달 3일 서울옥션의 중국 화가 작품 경매가 홍콩에서 열린다. 부실 저축은행 수사에서 압수된 작품들이다. 사진은 9일 서울옥션 강남점을 찾은 관람객이 경매에 나갈 작품들을 미리 둘러보는 모습. 조용철 기자

부실대출로 전국을 들끓게 했던 저축은행과 금감원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부산저축은행 등 경영진에서 압수한 물건들에 대한 경매가 20일 시작된다. 이번 경매에 나올 작품은 박수근, 고영훈, 장샤오강(중국) 등 국내외 유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 91점으로 연말까지 진행된다. 모두 지난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저축은행 수사를 시작하면서 압수한 물건들이다. 검찰의 압수품 중엔 국가문화재인 ‘월인석보(月印釋譜) 9, 10권’(보물 745~3호) 등도 포함돼 눈길을 끈다. 김민영 부산2저축은행 대표에게서 압수한 물건이다.
 
박수근·쩡판즈·장샤오강 작품도 나와
8일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 사무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정기 미술품 경매를 준비하느라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이번 정기 경매엔 총 124점의 미술품이 나오는데, 이 중 4점이 저축은행에서 압수한 작품이다. 91개 압수 미술품 중 1차분인 셈이다. 9조원대 부실대출로 파산선고를 받은 부산저축은행과 계열 은행 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이다. 압수된 미술품의 소유권은 부실 저축은행 파산으로 예금자들의 손실 예금을 보상(5000만원 이하 예금)하게 된 예금보험공사가 갖고 있다. 서울옥션은 예보가 의뢰한 첫 작품 경매에 공을 들이고 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나머지 87점에 대한 경매도 순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각 대금은 모두 예금 피해자들과 후순위 채권 투자자들을 위한 재원으로 쓰이게 된다.

통상 경매 시작 가격에 해당하는 최저 가격은 감정을 통해 서울옥션이 정하지만 예보가 의뢰한 미술품은 ‘다르게’ 취급된다. 서울옥션은 제3의 기관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감정과 평가를 근거로 예보와 함께 가격을 정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경매 대금이 저축은행 피해자를 위해 쓰이기 때문에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시장성 있는 금액으로 책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첫 경매에 부쳐지는 저축은행 소장품 중 하나인 고영훈 화가의 ‘스톤북’도 이런 절차를 거쳤다. 경매 시작가는 6800만원으로 결정됐다. 제주 출신인 고영훈은 200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한국 작품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한 국내 대표 화가다. 전병헌의 ‘블로섬’(1400만원), 김강용의 ‘현실+상 307-413’(2000만원), 오치균의 ‘풍경’(3500만원)도 같은 방식으로 시작가가 책정됐다.

서울옥션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다음 달 3일 홍콩에서 여는 미술품 경매다. 중화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국 화가의 작품 10점이 경매에 부쳐진다. 역시 부실 저축은행에서 압수한 그림들이다. 대표적인 작가는 중국 4대 현대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장샤오강(張曉剛). 1968년생인 작가는 중국 문화혁명 이후 세대로 중국의 현대화와 함께 전통적인 가정의 붕괴를 표상하는 ‘혈연’ 시리즈로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006년 국내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는 그림이 전시회 개최 전에 모두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에 홍콩 경매에 나오는 저축은행 압수품은 장샤오강의 ‘혈연’ 시리즈 중 하나. 시작가는 7억원대로 정해졌다. 또 다른 중국 대표 현대화가인 쩡판즈(曾梵志)의 그림 ‘트라우마’(8억2500만원), ‘초상’(5억원)도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트라우마는 그림 전면에 매화빛 꽃들이 얹혀 있는 듯한 기암괴석과 고뇌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국 1세대 작가인 양사오빈(楊少斌)의 ‘폭력의 본질’(7000만원)도 나왔다. 이 밖에도 인자오양(尹朝陽)의 ‘천안문 광장’(7800만원), 신예 작가인 펑정제(俸正杰)의 ‘중국 초상’(3000만원), 천롄칭의 ‘잠긴 도시’(1500만원)도 경매에 오른다. 또 영화감독이자 화가인 줄리안 슈나벨(미국)의 ‘무제’(9500만원)도 홍콩 경매에 모습을 드러낸다. 올해 말까지 경매에 나오게 될 저축은행 압수품 중엔 국내 유명 화가인 박수근의 작품 ‘줄넘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그림은 2007년 일반에 처음 공개된 것으로 가로 30㎝, 세로 40㎝ 크기다. 여러 명의 아이가 줄넘기하는 모습이 박수근 특유의 질감 있는 유화로 묘사돼 있다. 경매는 4월 중 이뤄진다.

화재 해외 경매는 원천적으로 불가
부산2저축은행 김민영 대표가 소장하던 월인석보
저축은행 압수품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이 월인석보다. 월인석보가 만들어진 것은 1459년 조선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권좌에 오른 세조. 그는 자신의 아들이 죽자 세자를 기리기 위해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만들어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바탕으로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 부분으로 한 석가의 일대기를 만든다. 이것이 ‘월인석보’다. 목판을 짜서 찍어낸 책이기 때문에 당시의 인쇄기법을 비롯해 조선 초기의 불교문화, 한글 초기 변천과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월인석보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1983년. 이 중 11권과 12권은 보물 935호로 별도 지정돼 있다. 원본이 완벽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는 탓에 총 몇 권으로 돼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2·7·8·9·10·13·14·17·18·21·22권 등 총 12권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경매 대상이 될 책은 9권과 10권이다. 다른 월인석보 초간본 등은 서강대, 동국대, 연세대, 고려대, 호암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검찰이 월인석보를 확보하게 된 사연은 기구하다. 지난해 3월 초순 중수부는 부산저축은행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을 했다. 수사 반경을 넓히던 검찰은 이상한 거래 정황을 포착했다. 압수수색 후인 3월 22일 김씨가 사업가 심모씨와 10억원대 거래를 했던 것이었다. 김씨를 추궁한 수사팀은 깜짝 놀랐다. 월인석보를 포함해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10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을 때 아내의 치마폭을 잘라 글을 썼던 하피첩(霞皮帖),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3권 등 보물 18점을 ‘10억원’에 사업가 심씨에게 팔았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이 보물의 향방을 추적하자 김씨는 10억원을 심씨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직접 검찰에 보물 18점과 고서화 950여 점을 제출했다. 이금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은 “당시 김씨가 보물을 임의로 제출하면서 소유권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부실대출의 책임을 지고 예금자들을 위한 손해배상을 위한 담보로 예보에 제출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근 검찰로부터 보물급 문화재를 넘겨받은 예보는 부산2저축은행에 대한 김씨의 부실 책임 조사를 벌이고 있다. 김씨가 은행에 입힌 피해액을 산정하는 작업이다. 예보는 피해액 산정이 끝나면 곧바로 법적 절차를 거쳐 월인석보 등의 문화재 매각에 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 김씨가 소유권을 포기했지만 배상액을 확정하는 단계에서 김씨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김씨가 소유권 포기 입장을 유지한다면 매각은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파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통상 보물급 문화재는 문화재관리법에 의해 엄격히 관리된다. 해외 반출이 금지되기 때문에 해외 경매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보물급 문화재를 여느 저축은행 압수품처럼 개인이 살 수 있는 경매에 내놓는 것도 논란이 일 수 있다. 국가에 무상으로 기증하거나 국립미술박물관 등 기관을 대상으로 한 제한 입찰에 부치는 것도 방법이지만 쉽지 않다. 매각 대금을 저축은행 부실로 인해 피해를 본 서민 예금자들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엄태식 예금보험공사 특수자산부 팀장은 “보물이라는 특성과 저축은행 예금자 구제 목적에 맞는 매각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